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겨울폭풍 작전 (문단 편집) === 소련군의 대응 : 소(小) 토성 작전 === 하지만 소련군의 반응은 신속했다. 공세를 확인한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는 포위망의 돌파가 우려되는 상황이라는 것을 즉각 깨달았고, [[스탈린]]에게 병력의 신속한 재배치를 제안했다.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와 스탈린은 초기에는 병력 재배치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 5충격군을 지휘하던 예레멘코 등 현장에서도 병력의 재배치를 요구하는 상황이 이어지자 결국 병력의 재배치에 동의하고 신속하게 증원군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12월 15일, 겨울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한 지 3일만에 병력의 증편이 결정났다. 본래 포위망의 증강에 투입될 예정이던, [[로디온 말리놉스키]]가 지휘하는 2근위군의 투입이 결정되었다. 여기에 기존의 공세 계획이던 토성 작전을 소 토성 작전으로 개편하여 돈 집단군의 구원 시도 자체를 봉쇄하는 동시에 대대적인 반격을 펼친다는 전략이 확정되었다. 12월 16일, 소련 1근위군과 3근위군, 그리고 6군은 돈 집단군과 홀리트 분견군의 좌측면을 보호하고 있던 이탈리아 8군에 대해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했고 18일에는 일부 지점에서나마 이탈리아군이 형성한 전선에 구멍을 내는 데 성공했다. 이탈리아 8군은 약체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정예병력이라고 할 수 있는 산악군단을 주축으로 한 병력이었고, 특히 산악군단의 경우 기존 작전 지역 등을 산간지역 일대 등으로 상정한 덕분에 소련의 동절기 기후에도 투혼을 잊지 않고 용맹을 발휘했지만, 심각한 동계 장비 부족 및 늘어질대로 늘어진 보급선 덕분에 턱없이 모자랐던 보급품, 예비대로 투입될 수 있는 병력의 부재 등의 악재가 겹치며 결국 전선에서 물러나야 했다. 악사이 강을 건넌 독일군에 대해서는 4기계화군단과 13전차군단이 반격을 감행해 2근위군이 도착하여 독일군의 공세탄력을 흡수할 시간을 벌게 되었다. 압도적 수적 열세 속에서 악전고투를 펼친 데다 때마침 악화된 기후 사정까지 겹치면서 호트 기갑집단의 전반적 공세탄력은 심각하게 둔화되었다. 12월 19일에는 독일군의 야전 공항이 있는 타친스카야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가 감행되면서 [[루프트바페]]의 활동마저 위축되는 상황에 이르른 판이라[* 단지 기세 문제만도 아닌게, 이 공세 와중에 독일군은 가용했던 수송기 전력의 10% 가까이를 상실해야 했다.] 만슈타인은 지속적인 공세 가능성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고, 6군에게 신속하게 돌파작전에 조응할 것을 요구했다. 소련군의 대대적인 반격에도 불구하고 6기갑사단이 스탈린그라드로부터 고작 5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까지 도착한 만큼, 이러한 양면 공세를 통한 돌파 가능성은 결코 희박하지만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이 만슈타인의 인식이었다. 하지만 파울루스는 지난 몇달간 수십만의 피를 흘리며 점령, 방어한 스탈린그라드를 포기하는 것은 히틀러의 현지사수 명령에 반하는 것으로 보았고, 게다가 제6군 참모장 슈미트까지 잔류를 주장하였다. 결국 파울루스는 30km지점까지 진격을 요청하였고, 답답해서 개빡친 만슈타인은 직접 히틀러에게 철수명령을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12월 18일 히틀러는 6군의 돌파 작전을 불허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파울루스는 결국 만슈타인의 돌파 요구를 거부하고 스탈린그라드에 잔류했다. 이 잔류에서 하나의 떡밥이 나오는데, 연료와 탄약 및 병력 부족으로 6군의 돌파 역량이 부족했다는 점을 들어 만슈타인이 어차피 구출이 어려워진 6군을 버리고 6군 사령관인 파울루스에게 작전 실패의 책임을 떠넘기려 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해석은 자유지만, 예비대가 사실상 전무한 만슈타인의 입장에서도 스탈린그라드까지 50킬로미터 남겨둔 지점까지 진격한 이상의 공세 역량이 부족했다는 점에서 파울루스의 의지 부족이 작전 실패의 원인이라는 주장에도 충분한 설득력이 있긴 하겠다고 말할 순 있다. 다만 1달가량 고립되어 제대로된 보급을 받지 못해 차량은 연료가 없어 움직이지 못하고 말은 전부 도살한데다가 부대전체가 기아상태인데 최고사령관은 '''절대사수'''를 명령하고 직속상관은 도보로 적 부대를 돌파해서 눈보라와 50km의 깊은 눈밭을 이동하라고 '''조언'''한다면 누구나 고민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생각해야 한다. 6군의 상황을 생각하면 파울루스가 돌파요구를 받아들여서 돌파 시도했어도 6군은 일부만 살아서 탈출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당시 스탈린그라드의 기아상태를 짐직할 수 있는 예시는 아래와 같다. >차이츨러 장군은 스탈린그라드에서 굶고있는 병사들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식사량을 그들수준으로 줄였다. 알베르트 슈페어에 따르면, 그는 몸무게가 2주도 안 되어 22파운드가 줄었다.[*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 전투, 2012년, 470페이지] 2주만에 체중이 10kg이 줄어들[* 게다가 병사들은 혹독한 환경에서 전투및생활을 해야했기에 상태가 더 안좋았을것이다] 식사량으로 1달이상 생활한 사람에게 50km이동이 아니라 50km전선 돌파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으니 이렇게 보면 설사 만슈타인이 돌파를 완료해서 6군에 합류했더라도 과연 6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걸어나올 능력이 있었는지 자체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